며칠 전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뜻밖의 질문을 받았다. 요즘 일상 속 AI 활용이 얼마나 자연스러워졌는지 새삼 생각하게 만든 일이었다.
“어제 보내신 이메일, AI가 작성한 겁니까? 아니면 직접 작성하신 겁니까?”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조금 의아했다.
그래도 대답은 간단했다.
“AI의 도움을 받아서 제가 작성한 겁니다.”
그랬더니 변호사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선생님 같은 분 때문에 제가 올해 말에 은퇴하는 겁니다.”
응?
무슨 뜻이지?
변호사가 올해 말 은퇴할 예정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나 같은 사람 때문에 은퇴한다는 것일까?
농담인지, 칭찬인지, 아니면 은근한 불만인지 알 수 없었다.
솔직히 지금도 잘 모르겠다.
12페이지 계약서를 받은 날
나는 현재 오랫동안 운영해 온 가게의 매각을 진행하고 있다.
매각 과정에는 여러 가지 서류가 오가고, 변호사를 통해 계약 조건을 검토하고 협의하는 일도 필요하다.
최근 변호사로부터 12페이지에 달하는 계약서 초안을 받았다.
그렇다고 내가 영문 계약서를 처음 접하는 것은 아니다. 20년 동안 회사 생활을 하면서 여러 종류의 계약서를 다뤄본 경험이 있다.
계약서를 볼 때 어느 부분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하고, 어느 부분은 전체적인 취지를 확인하면 되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 물론 계약서마다 내용이 다르고 중요한 조항도 다르므로 익숙하다고 해서 소홀히 볼 수는 없다.
다만 영어로 된 법률 문장은 여전히 복잡하고, 자신의 입장에서 어떤 부분을 수정하거나 확인해야 할지 정리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번에는 그 과정에서 AI의 도움을 받았다.
계약서 내용을 확인하면서 궁금한 부분을 짚어보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항들을 정리했다. 수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부분도 하나씩 검토했다.
그렇게 작업을 마치고 계약서를 받은 날 오후에 변호사에게 의견을 회신했다.
12페이지짜리 계약서에 대한 답변이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으니 변호사도 조금 의아했을지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보낸 이메일의 문장이 지나치게 반듯하고 정돈되어 있었던 것일까?
어느 쪽이든 변호사가 AI 사용 여부를 물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AI가 쓴 것과 AI의 도움을 받아 쓴 것은 다를까?
변호사의 질문을 받고 나니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이메일은 과연 누가 쓴 것일까?
문장을 다듬고, 복잡한 내용을 정리하고, 상대방이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는 일에는 AI가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어떤 조건이 나에게 중요한지, 어떤 부분에 동의하기 어렵고 무엇을 수정하고 싶은지는 내가 판단했다.
AI가 내 대신 가게를 팔아주는 것도 아니고, 계약 조건을 결정해 주는 것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AI의 도움을 받아 내가 작성했다고 대답한 것이다.
사실 이메일을 보낼 당시에는 AI가 정리해 준 문장도 대부분 내가 평소에 사용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몇 군데는 평소 내 말투와 조금 다른 표현이 섞여 있었다.
어쩌면 변호사는 그런 부분에서 AI의 흔적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재미있는 일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분명히 전달했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은 그 문장을 누가 작성했는지 궁금해한 것이다.
물론 AI가 정리한 내용이 항상 정확한 것은 아니다. 특히 계약서처럼 법적 책임이 따르는 문서는 그럴듯한 설명만 믿어서는 곤란하다. 최종적인 법률 검토와 판단에는 여전히 변호사의 전문성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AI의 도움으로 내용을 더 빠르게 정리하고, 전문가에게 전달할 질문과 의견을 명확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장점이다.
이번에는 Schedule A까지
그 무렵 또 다른 서류를 작성할 일이 있었다.
상대방이 보내온 Schedule A라는 계약 첨부서류였다.
내용을 검토하다 보니 내 입장에서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처음부터 거창하게 문서를 새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저 기존 서류를 바탕으로 필요한 내용을 정리하려고 AI의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작업이 생각보다 쉽게 끝났다.
문서의 형식을 갖추고, 항목을 정리하고, 표현을 다듬는 과정에서 예전 같으면 꽤 시간을 들였을 일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처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완성된 문서를 보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상대방이 보내온 서류와 내가 새로 작성한 서류의 스타일이 놀랄 만큼 비슷했던 것이다.
제목을 배치하는 방식이나 항목을 정리하는 모습까지 어딘가 닮아 있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저쪽도 AI를 사용한 것 아닐까?’
물론 알 수 없는 일이다.
계약 관련 문서는 원래 비슷한 형식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고, AI 역시 그런 문서의 일반적인 작성 방식을 따랐을 수 있다.
그런데도 묘하게 웃음이 났다.
변호사는 내가 AI를 사용했는지 궁금해하고, 나는 상대방도 AI를 사용한 것이 아닌지 궁금해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러다 계약 당사자들이 서로의 문서를 보며 “이거 AI가 쓴 것 같은데?” 하고 의심하는 시대가 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미 그런 시대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AI를 얼마나 잘 쓰는지도 능력이 되는 시대
얼마 전 한국의 한 신문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읽었다.
직원을 채용하면서 기존의 학력이나 경력, 출신 배경보다 AI를 얼마나 잘 활용할 수 있는지를 중요하게 평가하는 채용 사례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기사를 읽으면서 세상이 참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좋은 학교를 나오고, 관련 경력을 쌓고,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는 것이 취업에서 중요한 경쟁력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런 조건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이 모든 것을 직접 알고 처리하는 능력뿐 아니라, AI를 이용해 필요한 정보를 찾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도 평가받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에서 일자리를 찾는 방법을 알아보면서도 느꼈지만, 새로운 기술에 적응하는 능력 역시 앞으로 중요한 경쟁력이 될 것 같다.
이번에 내가 경험한 일도 그런 변화의 한 단면인지 모르겠다.
20년 동안 회사 생활을 하며 익힌 계약서 검토 경험이 있었기에 어떤 부분을 확인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었다. 여기에 AI가 더해지면서 내용을 정리하고 문서를 작성하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기존의 경험이 AI 때문에 쓸모없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AI를 활용하는 데 도움이 된 셈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새로운 기술을 배울 이유가 없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이 있는 사람일수록 AI에게 무엇을 물어봐야 하고, 어떤 답변을 의심해야 하는지 더 잘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경험이 많다고 AI를 반드시 잘 활용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직접 사용해 보고, 결과를 확인하고, 자신의 일에 맞게 활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일상 속 AI 활용, 질문부터 달라져야 한다
AI를 사용하면서 한 가지 습관이 생겼다.
무조건 답을 달라고 하기보다 먼저 내가 무엇을 알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계약서를 검토할 때도 단순히 요약해 달라고 하기보다는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알려주고, 빠진 내용이나 확인할 사항이 있는지 물어본다.
물론 실제 계약서의 내용이나 개인정보를 AI에 입력할 때는 공개해도 되는 정보인지 주의해야 한다.
AI에게 질문을 잘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 답을 자신의 경험과 상황에 맞게 판단하는 일이다.
집 앞 야드세일에서도 AI를 만나다
그런데 오늘은 집에서 야드세일을 하다가 또 재미있는 일을 경험했다.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을 내놓고 가격을 정하는데 AI의 도움을 받았다.
중고 물건이라는 것이 가격을 정하기가 애매하다. 새 제품처럼 정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오래되었다고 무조건 값어치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AI를 이용해 적당한 판매 가격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물건을 사러 온 사람들도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제시한 가격이 적절한지 AI로 검색해 보는 것이었다.
순간 웃음이 나왔다.
파는 사람은 AI에게 얼마를 받아야 하는지 묻고, 사는 사람은 AI에게 얼마를 내야 하는지 묻고 있었다.
물론 AI가 알려주는 중고 가격이 반드시 맞는 것은 아니다. 물건의 상태나 지역, 실제 거래 상황에 따라 가격은 달라질 수 있다.
그래도 양쪽 모두 AI를 참고하고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다.
예전에는 물건을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각자 알고 있는 정보와 경험을 바탕으로 흥정했다.
그런데 오늘은 파는 사람도 AI에게 물어보고, 사는 사람도 AI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며칠 전에는 변호사가 내 이메일을 보고 AI가 작성했느냐고 묻더니, 오늘은 집 앞에서 중고 물건 하나를 사고파는 데도 AI가 등장했다.
정말 AI 세상이다.